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대형사건 발생 === 1993년 6월 5일, 파키스탄군이 주축이 된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군이 정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시작은 UN 평화유지군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던 라디오 방송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내보내던 아이디드군에 빡친 UN군이 칼을 뽑아들은 것이었다. UN군은 아이디드 군이 점령하고 있던 선전기구로 활용되던 라디오 시설과 언론사, 무기 시장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군 경기갑 여단을 파견했는데, 거꾸로 아이디드 군의 매복에 당한 것이다. 이 결과로 파키스탄군 24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하는, UN 평화유지군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사망한 파키스탄군의 일부가 시체 훼손이 되면서 끌려다니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CNN에 보내고 UN 철수를 요구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한다. 다음 날인 6월 6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안보리 837 결의안이 나온다. 요는 발을 빼고 있던 클린턴에게 UN이 아이디드는 나쁜 놈이니까 미군 파견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엄청난 사건에 충격도 받았지만 평화유지 작전이 전투작전으로 변질될 것까지 예상을 못한 파키스탄은 핵심 전투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켰고[* 마지막까지 전차부대가 남아있었다. 추가로 앞서 설명한 안보리 결의 837호의 내용이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는 전투작전이다보니 파키스탄은 반대표를 던졌다.], 짐바브웨와 루마니아, 스웨덴도 이러리라곤 예상을 못해 병력을 철수시키자 이어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 변화에 클린턴은 어쩔 수 없이 공격헬기 몇 대와 AC-130 건쉽을 파견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파라 아이디드는 이걸 또 선전하면서 자칭 소말리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마흐디와 아토의 무장 세력과 여전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두 세력은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아토 세력은 싸우길 포기하고 나중에 아이디드의 무장세력으로 완전히 흡수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